목적지에 따라 가야 할 플랫폼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플랫폼은 각각 다른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음. 잘못 올라가면 다시 내려왔다 맞는 곳을 찾아서 가야 함)
전광판에 '어느 플랫폼엔 어디 행 열차가 오고 지금 그 열차가 어디까지 왔다' 이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런 식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의미 파악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광판 형태에 대해선 대충 넘어가시길)
타는곳 길머리 ....
1 용산 ....
2 영등포 ....
전광판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길머리'가 무슨 뜻이지?
'길머리'의 정확한 뜻은 생각이 안 났지만 분명 '뭔가가 시작되는 곳'이란 의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건 생각이 났다. 그럼 1번 승강장에 들어오는 열차는 용산에서
출발한 건가? 그런데 어디로 가는 기차지? 목적지는 왜 안 나오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여기 쓰여진 '길머리'란 말이 어쩌면 목적지를 가리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번 승강장으로 올라가 봤더니... 역시나 용산행이었다.
한참 생각한 덕에 열차는 하나 놓쳤다.
국어사전에서 '길머리'를 찾으면
[명사] =길목 .
다시 '길목'을 찾으면
1 큰길에서 좁은 길로 들어가는 어귀. ≒길나들이 ·길머리.
세 갈래 길목
큰길로 가다가 오른쪽 길목으로 빠지면 바로 우리 집이다.
2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어귀. ≒길나들이 .
길목을 막다
길목마다 지키다
그는 그녀가 다니는 길목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어떤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혁명의 길목
금세기는 다원적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 서 있다.
위와 같이 나온다.
세부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곳' 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우리말의 기본적인 의미와 전혀 반대되는 말을 만들어서 쓰는 것인가?
'일본식 철도용어를 알기쉬운 우리말로 고친다'에 관련된 뉴스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15&article_id=0000179299§ion_id=102&menu_id=102
위 뉴스에는 안 나오지만 어떤 말이 어떻게 바뀌었나에 관한 건 다른 뉴스에 또 나오는데
...[선략] 대합실은 '맞이방' , 행선지는 '길머리' 로 바뀐다. 대합실은 기다린다는 뜻의 대합 (待合.まちあぃ) 에 방을 뜻하는 실 (室) 이 붙은 것이며 우리말에는 대합이란 한자어가 없다. 이를 기다리고 맞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맞이방으로 바꿨다. 행선지는 가는 곳을 뜻하는 행선 (行先.ゆきさき) 에 목적지의 지 (地) 가 붙은 것이어서 순우리말인 길머리로 바꿨다. 같은 방식으로 개표 (改標) 는 '표확인' 으로, 승강장.홈은 '타는 곳' 으로 고쳤다.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식 용어도 쉽게 풀어썼다. 전도역 (前途驛) 은 '다음역' 으로, 월승 (越乘) 은 '더 가기' 로 고쳤다 [후략] ....
위에서 보듯 일본말 '행선' (유키사키) 을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한글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행 : '갈 행' 이니까 '길' 로.
선 : '앞 선' 이니까 앞=머리니까 '머리'로.
그래서 행선->길머리가 된 것 같은데...
글자 한 자 한 자를 기계적으로 바꾸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우리말과 의미가 반대되는 이런 이상한 신조어가 나오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일본어의 '先'은 여기서는 '머리'의 뜻도 아니다. 여기서의 '先' 을 이미지화해 보면
어떤 시스템이나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있다고 가정하자. 중앙에는 핵이 있고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나간다. 가지 중에서도 잔가지는 사방으로 많이 뻗어 나가고 각 잔가지의 끝은 외부세계와 접촉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뻗어나간 것의 맨 끝부분, 즉 선단(先端), 또는 말단(末端)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선(先)'이다. 영어로 하자면 'end' 또는 'terminal' 정도의 느낌이 된다. 따라서 先이라는 글자의 의미 중 '먼저'라는 의미는 여기서는 전혀 없으며 '머리'라는 의미 역시 전혀 없다.
대략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先이 이런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단어에는 '거래선(去來先)' 이 있다. '거래선'의 先도 역시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대측의 접점이란 의미이다.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면서 이상해진 대표적인 예로서는 몇 년 전 일본말 '노견'을 우리말로 '길어깨'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정말 글자 한 자 한 자를 그대로 한글로 바꿔 버린 경우인데, 이제 욕 많이 먹고 다시 '갓길'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가장자리+길' 의 뜻이니 의미상으로도 무리가 없는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다.
행선지란 말을 쓰기 싫다면 그냥 '목적지'라고 하든지, '마지막 내리는 곳'이라고 하든지.
길***이란 꼴을 꼭 쓰고 싶다면 예를 들어 '길끝'이나 '길막' 과 같은 식으로 의미상으로 끝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실제로 길끝이나 길막은 물론 말이 안 된다. 예를 든 것일 뿐)
일본식 용어를 없애기 위해 새로 만들어낸 우리말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우리말과 의미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liquidbird

